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문산 전투 (문단 편집) === 이어진 추격, 지암리 포위전 === 승세를 탄 6사단은 22일까지 미 9군단의 1차 목표로 지정된 홍천강-청평댐선의 통제선 "조지아"를 확보한 후 23일 새벽 4시부터 군단 정면 압박부대로 전환, 달아나는 중공군 무리를 맹렬히 추격했다. 군단 포위망 우익의 미 7사단 17연대와 좌익의 미 24사단 21연대는 전차와 차량화 보병으로 구성된 [[태스크 포스|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6사단의 양 측방으로 고속 진출시켜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일대로 예상되는 중공군 집결지 북방에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때 포위망에 걸려든 중공군 부대는 용문산에서 맞아 싸우던 제63군 병력이 아닌 그 동쪽에 있던 제60군 제180사단 병력이 대부분이었다. 제63군은 그나마 지휘관의 적절한 상황 판단으로 재빨리 다시 북한강 이북으로 물러나 청평에서 포천 방향으로 퇴각했으나, 제60군 제180사단은 강촌 일대에서 우물쭈물하다가 퇴각의 적기를 놓치고 포위된 것이다. 결국 지암리 남쪽에 갇힌 중공군 제180사단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각개격파당했고, 급기야는 소부대로 쪼개어 무질서하게 포위망을 빠져나가야 했다. 한국군 6사단과 미 9군단은 이러한 적 부대가 식별될 때마다 포격과 공습으로 강타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이 시점에서 중공군은 전투의지를 완전히 상실하여 무장도 없는 [[노무자]]에게 1개 분대가 투항하거나, 가설병 3명에게 소대가 무장을 해제당하고 투항하는 등 소대, 중대, 심지어 대대급이 줄지어 항복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물론 중공군 중에서도 아직 전투의지가 남아있던 이들은 있었고, 이들로 인해 포위전 과정에서 몇몇 사병들이 전사당했다. 29일까지 전개된 지암리 포위전에서 6사단은 한국전쟁 최대 수준의 포로획득 전과를 거두었다. 6사단에서만 살상전과를 제외하고서도 [[포로]] 2,600명을 획득했고, 그 가운데서도 지암리 전투 도중 화천 추격전에 전환 투입된 다른 두 연대와 달리 끝까지 포위전에 참가한 19연대가 1,700명의 중공군을 사로잡았다. 6사단의 포위망을 어떻게든 벗어난 중공군도 군단 서측 포위망 외곽의 미 24사단에게 대부분 포착되어 투항했으며, 그 수효도 2,000명에 달했다. 이처럼 용문산에서 공세가 좌절되고 청평-포천-철원 방향으로 퇴각하며 미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은 중공군 제63군과, 지암리에서 미군과 한국군 6사단의 협공에 사실상 궤멸당한 제180사단 등은 후방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전투력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UN군이 제63군이 다시 배치된 것을 확인한 것은 용문산 전투 다섯 달이 지난 51년 10월의 일이었다. 육군본부 판단에 따르면 5월 30일까지 제63군에서만 18,500명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 손실이 집계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